힐링명사
국민에게 희망의 빛을 전달합니다. 한국문화예술명인회

힐링명사 박정혜시인 / 문학치유사, 간호사
2018-07-26 17:40:42
한국문화예술명인회

 

 

 

 

 

 

 

 

 

 

   경력

 

*  경상남도인재개발원 외래교수역임

*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내 <독서치료>과목 강사역임

*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내 <독서치료>과목 강사역임

* 2017 현재 :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겸임교수

 

* 전북교육문화회관 시 ‧ 수필 창작 강사역임

* 전주시민대학 문학치료-심상 시치료- 강사역임

* 전주 완산 시립 도서관 치유 자서전 강사역임

* 전주 및 군산 교도소 인성교육 및 문학치료 강사역임

*지역특성화문화예술지원사업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여성 대상)

* 2017 현재 : 전주시민대학 치유 글쓰기-나만의 자서전- 강사

 

 

 

힐링문화 특별기고 **여름호**

찬란의 시작 / 박정혜

 

벽강 류창희 <찬란>

오래전, 오랫동안 나는 속이 새까맣게 탔다고 생각했다. 나는 원래 시커멓고 암울하고 축축하고 눅눅하고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늘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그게 내 자리였다. 길을 걸어갈 때면, 바닥을 바라보고 걸어갔다. 백 미터 전방에 아는 사람이 오더라도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런 까닭에 선배나 어른들은 나를 건방지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고개를 잘 들지 않았는데 그게 내 오랜 버릇이었다. 초등학교 때, 겪었던 일련의 일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제일 잊지 못할 일은 언니가 당했던 구타였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고, 우리 집은 부자에 속했다. 마을에서 텔레비전이나 냉장고를 가장 먼저 들여놓고 살았다. 여러 우여곡절은 있었겠지만, 그래도 지속적으로 부잣집 딸이라는 꼬리표가 늘 붙어 있었다. 그미가 다니는 단골 양장점이 있어서 언니와 나는 그 가게에서 수작업으로 지은 옷을 입고 다녔다. 팔랑거리는 분홍 실크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내 모습이 당시 아이들이 볼 때 얼마나 눈꼴 시려웠을까. 나는 늘 왕따를 당하곤 했다.

 

언니의 반 담임선생님과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을 비롯해서 학교 선생님들 여럿이 우리 집에 초청되어 오기도 했다. 아마도 아버지의 생신날에 그렇게 초대했던 것 같다. 벽돌공장을 하던 아버지의 사업은 그 당시 개발 열풍으로 인해 번창하고 있었다. 다만, 마음이 약하고 고운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신용보증을 서는 바람에 곤란해지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급기야 아버지의 사업은 부도가 나고 그 후부터 거의 생의 마지막까지 아버지는 용달차를 몰아야 했다. 부도로 확정되기 전 몇 년간의 사업이 정체된 시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집안이 어수선할 때였다. 언니는 엉치뼈가 부러진 채 집으로 왔다. 너무나 아파서 우는 언니를 병원에 데리고 진찰한 결과 그렇게 진단이 나온 것이다. 알고 보니 언니네 담임은 대놓고 돈을 요구했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줄 돈이 없다고 했다. 그런 다음 날, 언니네 담임이 언니를 그 지경으로 만들고 만 거였다. 아버지는 당장 고소하기 위해 소장을 적었다. 학교 교장이 찾아와서 통 사정을 했다. 결국 아버지는 소장을 스스로 찢어버렸다. 그게 올바른 행동이었을까, 나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런 사건이 일어나서 일 년쯤 후였나 보다. 우리 반 담임은 숙제를 따로 봐주겠다는 빌미로 집으로 찾아왔다. 담임이 직접 공부를 가르치겠다고 하니 그미는 지극 정성으로 과일을 준비해서 한 상 차려 내왔다. 공부방에서 담임은 느닷없이 내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대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나한테 했던 행동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몇 년 후,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겨우 알게 된 것은 그게 키스였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담임은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삼십 대 혹은 사십 대 정도의 나이였고 아내와 내 또래의 아이도 있었다. 그가 나한테 했던 행동은 다만 역겨울 뿐이었다. 게다가 그게 그런 행동이었는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아마도 그날 우리 집 문을 열고 나서는 담임한테 나는 늘 하던 대로 공손하게 인사를 했을 것이다.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도 내가 바보스럽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왔다. 나는 지금, 그런 어린 나를 껴안아 주고 싶다.

 

그런 결정적인 두 가지 이유로 해서 나는 선생이라는 직업을 경멸해왔다. 누군가 꿈이 교사라고 하면 비웃기까지 했다. 내 기준에 의하면 선생은 모두 위선자들이었다. 심지어 초등학교 일 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자주 화를 내며 매를 들고 호통을 쳤다. 그 선생님은 우리를 벌주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단 하나야. 이렇게 매를 들지 않으면, 너희들은 이다음에 나를 전혀 기억할 수 없을 거야. 기억하라고 이렇게 매를 드는 거야.”

그 선생님이 틀렸다. 나는 그 선생이 누군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찢어지는 톤으로 했던 그 엉터리 말만 기억할 뿐이다. 그렇게 학교에 꼬박꼬박 다녔지만, 그런 마음으로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는 육학년 때부터 말을 잘 하지 않았는데 육학년 때 담임은 내가 벙어리인 줄 알았다며 웃기도 했다. 그건 웃을 말이 아니었다. 나는 더욱 침잠해져 갔다. 그러다가 그분을 만났다.

 

내가 겪었던 수많은 선생님들을 나는 잘 기억하지 않는다. 이름도 모습도 별로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분만큼은 다르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었지만, 유난히 다리털이 길던 모습까지 기억난다. 국어 선생님이었지만, 그 선생님은 가르치는 과목이 자신의 전공과는 다르다면서 고백했다. 교육학이 전공인데 국어 선생님을 맡았다는 거였다. 하루 종일 아무 말고 하지 않고 있던 내게 어느 날, 선생님은 쪽지 하나를 건네주셨다. 지금도 기억나지만, 그 쪽지는 예사롭지 않았다. 겉표지가 주홍빛이었다. 안쪽은 하얗고 반질반질했는데 오른쪽 하단에 순조롭게 항해하고 있는 돛을 단 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도 선생님이 직접 그린 것이지만, 친필로 쓴 글의 내용 중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안락의자 아니? 안락의자는 너무나 편해서 누구든지 앉고 쉬어 가고 싶어하지. 안락의자 같은 사람이 되어 보는 건 어때? 손을 펴보렴. 손을 웅크리고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해. 손을 펴야 뭐든 하지. 악수든, 물건을 잡는 것이든.’

그 편지 속에 손을 편 모습, 가위바위보 할 때 보를 한 모양의 꼭지가 달린 빨간색 볼펜이 함께 들어 있었다. 그리고 내 삶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 편지가 나를 ‘찬란’으로 바꾸어준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내 인생의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신 분. 나는 그분과 함께 한 봄 소풍 때와 결혼식 때 색종이를 뿌리던 내 모습을 찍은 사진을 사진첩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분은 결혼을 해서 일본 유학을 가는 남편을 따라가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신다고 했다. 한번은 내게 시집을 빌려주셨는데 나는 도시락과 함께 그 책을 넣어두어서 그만 김치 국물이 묻은 채 돌려드려야 했다. 너무나 부끄러워 숨고만 싶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그저 환하게 웃으셨다. 어느 날에는 너무나 장난이 심해서 떠들던 우리 반 아이들한테 모두 책상 위로 올라가서 무릎을 꿇게 하고는 선생님은 우셨다. 우리들을 잘못 가르친 당신의 잘못이 더 크다며. 이제 생각해보니 그런 선생님을 만난 것만으로도 나는 행운이었다. 작고 아담한 한옥에 사시면서 자주 우리를 초대하기도 했는데 그런 선생님을 자랑스럽고 믿음직스럽게 바라보고 계시던 선생님의 어머님의 눈빛도 기억난다.

선생님을 만난 것은 다만 한 학기 동안이었다. 그렇지만 내 생의 찬란은 선생님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된 것이었다. 너무나 그리운 송현숙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박정혜 시인, 문학치유사, 간호사

 

힐링문화 특별기고 **봄호**

비와 비와 비 / 박정혜

 

벽강 류창희 그림 <비>

 

 

루아, 이렇게 말하는 나를 용서해주렴.

루아, 나는 악을 선으로 갚아라고 했다. 그게 될 말이냐고 발끈 성을 낼 수도 있겠지. 어떻게 뭐라도 찔러보지 않고 분노의 칼을 거두라고 하냐고 언성을 높일 수도 있겠지. 맞아. 지금 나는 바보같이 말하고 있어. 바보가 되라고, 바보 말을 하고 있어. 너무 똑똑하게 살아온 탓에 우리의 삶은 늘 바짝 독이 올라있지. 하나를 주면 적어도 하나를 되돌려 받아야 하고, 하나를 주는데 둘을 돌려받으면 더 좋고. 그런데 하나를 줬는데 하나도 돌려받지 못하면, 화가 나는 것 말야. 무수하게 독이 오를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지. 혹시 손해라도 볼까 경계를 늦추지 않고 말야. 나는 지금, 아예 평생 돌려받을 생각도 하지 말길 종용하고 있구나. 게다가 그냥 주라고 하고 있어. 말도 안 된다고 발을 동동 굴리며 나를 노려볼지도 모르겠구나.

 

루아, 예비 신랑을 데리고 부모님을 찾아갔을 때, 아버지는 문전박대하고, 어머니는 간신히 들어오라고 하고는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선언하더라고 그랬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예비 신랑 집안 쪽에서 루아의 부모님을 업신여기듯 했던 말이 어찌해서 부모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이후 남자 친구를 극도로 싫어하게 되었다고 그랬지. 그 외에도 사사건건 루아의 행동이 부모님의 눈엣가시가 되었다고 했더랬지. 루아가 중학교 중퇴를 하고 오로지 집에서 공부해서 대학에 입학하게 된 것은 부모님의 지도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중학교 일 학년 때 동네 아이들한테 왕따 당했던 사건만으로 학교를 자퇴하게 한 부모님의 처사를 두고 나중에 루아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했던 걸 기억한다. 나름대로 갈등을 극복할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사회와 유리된 생활을 했던 십 대 초, 중반기의 나날들이 상처로 남아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게다가 대학 입학 전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았던 돈으로 태어나서 처음 파마를 했다가 그 돈이면 생활을 며칠 동안 더 할 수 있다며 무섭게 혼내는 부모님을 두고 많이 울었다고 했지. 돈 한 푼도 주지 않는 부모님을 원망할 시간도 없이 루아, 네가 이곳저곳 아르바이트로 너무나 바쁘게 살아왔던 것을 알고 있다. 정서적으로도 지지해주지 않아 마음이 아플 때면, 죽고 싶어서 자해까지 했던 네 모습을 기억하고 있단다. 이대로 두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 것 같아서 나는, 다른 여타의 상황들을 물리치고 네가 있던 기숙사에 무작정 가서 12회기의 심상 시치료를 행하기도 했었지. 루아, 넌 요행히 살아남았고, 그렇게도 그만 두고 싶어하던 대학을 무사히 졸업했구나! 나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제대로 된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구나. 엄마는 자신이 반대하는 결혼을 해서 상처가 많았다며, 루아가 좋다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지 허락하겠다고 하던 평상시의 말을 완전히 반대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네가 얼마나 답답한지, 얼마나 화가 날 것인지 짐작할 수 있구나.

이번 새해 명절에 나는 루아의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왕복 다섯 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를 두 번이나 다녀왔단다. 조금이라도 말이 통한다면, 너그럽게 루아를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싶었지. 그런데 부모님들은 워낙 완고하시더구나. 네가 와서 싹싹 빌지 않으면, 앞으로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거라고 하더구나. 뭘 그렇게 빌어야 하냐고 했더니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는데도 엄마의 생일을 챙기지 않는 불효, 엄마와 전화하면서 내뱉는 욕설, 번 돈을 제대로 부모와 공유하지 않는 섭섭함. 그렇게 말하더구나. 꿇어 엎드려서 빌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거라고 하더구나. 해서, 나는 라로 얘기를 꺼냈단다. 라로도 만만치 않게 나에 대한 분노와 원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동안 나는 잘 몰랐었다고. 알았다 하더라도 이제는 겁만 날 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착각을 밀치는데 반년은 족히 걸린 것 같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무한히, 실로 끝없이 라로를 용서했단다.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는 ‘내 고집에 의한 당위성’만 내려놓아도 라로는 미소를 되찾기 시작하더구나. 그런 얘기들을 진정으로 하고 싶었단다. 루아가 잘못을 빌러 오길 기다려서는 세월이 마냥 흐를 뿐이고, 원한의 골은 깊을 대로 깊어질 뿐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루아가 용서를 청하기 전에 먼저 루아를 용서해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단다. 그게 또, 바보처럼 살자는 말이었는데, 루아의 부모들에게는 귀를 씻고 싶을 정도로 불쾌한 말이어서 나는 급기야 루아 엄마의 노여움을 사고 말았단다. 날카롭고 찌푸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 없구나. 평화사절단의 내 임무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단다.

 

그렇게 루아의 부모님을 뵙고 와서는 한참 동안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안타까움이 밀려 오더구나.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다녀와서 대 여섯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단다. 내가 한 행동들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 되고 만 것 같아 허탈하기 짝이 없었단다. 게다가 루아의 부모들은 그들의 어머니를 늘 배격하고, 원망하고 그러면서도 두려워하며 아예 찾아뵈려 하지 않으면서! 하지만 나는 재빨리 루아의 부모님을 용서했단다. 두 분은 사고방식이나 생활이 경직되어 있고 마음이 닫힌 채라서 포용력이나 이해심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용서는 다른 것이 아니란다. 다만, 마음속에 박혀 있는 ‘미움’과 ‘증오’의 가시를 빼버리는 것. 엉키고 설켜 버린 내 감정의 실타래를 다시 원래대로 푸는 것. 더 이상 누군가의 흘겨보는 눈초리나 원망과 저주 혹은 비틀면서 하는 말을 귀담아 두지 않는 것. 더 이상 누군가가 내 일상을 침범하지 않고, 나는 내 일에 치중할 수 있을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용서일 것이다. 나는 그다음 날부터는 아련한 추억 속에 루아의 부모님을 넣어 두고 다만, 잘 지내시라는 인사를 할 수 있었단다.

 

그래, 루아야. 나도 안단다.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가까이 다가가면, 루아의 모든 사생활을 일일이 간섭하려 드는 부모님 때문에 힘들다는 것을.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자니 그것도 마음 아픈 일이라는 것을. 그러니, 부모님을 대하는 태도가 난감할 수밖에 없겠구나.

그렇더라도 길이 보이는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전혀 표가 나지 않더라도 주어라. 사랑을, 존경을, 감사를, 은혜를. 부디, 원망과 원한, 증오와 분노 따위는 잘 개켜서 강물에 띄워 보내거라. 하루에도 한 번씩 부모님께 다른 감정 전부 놓아두고 오로지 감사드려 보자 구나. 다른 것은 몰라도, 감사드릴 제목은 단 하나가 있으니, 생각해보렴. 이 세상에서 너무나 귀한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게 한 분이시니, 오로지 감사드릴 뿐! 가끔씩 안부 문자라도 드려보렴. 그리고 결혼식도 몰래 할 생각하지 말고, 또다시 문전박대를 당할 각오를 하고는 찾아가서 인사드리렴.

이 모든 것을 어떤 기대나 희망을 가지지 말고 행하길 빈다. 용서를 한 번 줬으니, 나한테도 뭔가를 해달라고 요청하고 싶다면, 차라리 용서를 말거라.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고, 부모님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될 때, 아니 ‘사랑’한다는 억지스러운 말을 일부러라도 하게 될 때 그때, 루아의 머리 위에 아름다운 꽃불이 켜지고, 더할 나위 없이 삶이 빛날 거라고 믿는다. 어떻게 ‘사랑’하냐고?, 나한테 그런 짓을 한 부모를 어떻게 봐주냐고 나한테 다시 물어볼 것 같아서 몇 마디 덧붙인다.

 

그냥 바보가 되어라. 그냥 바보가 되어 보자. 하나를 주고 욕을 들으면 그저 웃는 바보. 나는 며칠 전, 반나절 정도의 시간 동안 그분들을 만나면서 자식을 용서하는 방법을 조심스럽게 내 경우에 빗대어 알려주려다가 오히려 욕을 먹고 말았단다. 그 욕 때문에 또 나머지 반나절은 슬펐다만, 감히 말하고 싶다. 아무리 시끄럽고 정신없는 가운데에도 우리의 의식은 바른 것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비(雨)가 오면 울적해지듯이 비(非)가 비(悲)를 불러오는구나. 부모님들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그분들도 정작은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만의 잣대에 비추어서 하는 ‘그건 아니다’가 삶의 슬픔을 불러오는구나. 그렇더라도 나는 비가 그친 뒤의 맑고 푸른,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 하늘을 떠올리고 있다. 온통 푸르름이 가득한 그 하늘 아래, 살만큼 살다가 홀연히 훌쩍 떠나버릴 때쯤에 이미 삶 속에서 형벌을 받은 쪽은 ‘용서’를 ‘못한 자’일 것임을 안다.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더라도, 내 답은 똑같다. “안다!”

 

그러니, 사랑하는 내 조카 루아야, 아무 말 말고 바보가 되자. 나도 그러마.